수박 송(頌)

 

수박은 우선 커서 좋다. 한 덩어리면 온 식구가 먹고도 남는다. 예전에는 우물 안에 매달아 두거나 함지박에 물을 그득 부어 두둥실 띄워놓았다. 궁금하여 한밤중 우물가를 서성거리다가 들여다보면 수박은 다소곳이 매달려 있는데, 물 위에는 달이 하나 떠 있다. 수박과 달이 묘하게 겹쳐서 어린 시절 추억의 한 토막으로 남아 있다   함지박에 담긴 수박은 손을 탄다. 지나는 식구마다 그냥 두지 않는다 어린이는 가운뎃손가락을 접어 문 두드리듯 통통 두드려 보고, 어른은 손바닥으로 장비 배 두드리듯 철썩 때려 본다. 저마다 잘 익었다고 들 한다.   그 중량감 있는 상쾌한 소리一 터질 듯이 충만한 생기가 울려 나온다. 이런 밝은 소리를 내는 열매 과일이 또 있을까. 같은 과(科)의 호박은 늙어서 속이 비어도 울림이라곤 없다‥‥그 주글 주글 한 뱃가죽을 쓰다듬어 본들 무슨 흥이 일겠는가.   호박과 수박의 넝쿨을 비교하면 재미있다. 호박은 그 넓은 잎하며 굵은 줄기가 위로 뻗어야 열매가 실한데, 수박은 땅바닥에 착 붙어서 기어간다. 그러면서도 그 작은 잎은 햇빛을 발아들이고 줄기는 땅의 자양분을 잘 흡수하는 탓일까, 엄지손가락만 하게 맺혔다가 풍선같이 부풀어 오른다.

나는 나이가 들면서 제행무상(諸行無常) 같은 허무감에 잠기다가도 수박을 쪼갤 때면 생기가 돈다. 신선하고 벅찬 내실을 닮고 싶어서다.   수박을 냉장고에 넣어 두면 제대로 숨을 쉴까 걱정이 된다. 사실 냉장고 안에선 공기가 통하지 않아 쉬 상하고 무른다. 핑계 삼아 성급하게 꺼낸다.   칼을 대면 쩍 두 토막으로 쪼개진다. 소박하고 달콤한 향기가 이내 주위에 퍼진다. 그 향기는 멜론같이 고상한 냄새가 아니라서 오히려 친숙하게 느껴진다 귀족의 향기라기보다 서민 쪽에 가깝다.   속살은 소박한 향기에 걸맞게 수줍어하는 색깔이다. 속살을 드러내어 어쩔 줄 모르는 수박의 당황해 하는 모습이라 할까   커도 거드름을 피우거나 우쭐대는 품은 없다. 태양과 땅에서 받은 천혜의 복을 한껏 부풀려서 사람의 식욕을 만족시켜 주려고 한다. 사람에게 속살을 아낌없이 내주고는 그 검은 씨를 눈물방울같이 뽈뽈 쏟아 놓는다. 수박의 검은 눈물방울   씨 없는 수박이라 해서 세인의 관심을 끌었던 일이 있었는데, 씨 없는 수박은 한 마디로 싱겁다. 장비의 큰 배에 만일 배꼽이 없다면 얼마나 싱거울까.   욕심쟁이도 씹어 먹을 수는 없다. 입 속에서 가려내거나 손가락으로 후벼내야 하기 때문이다 캔디를 우지직 씹어 먹는 사람도 수박 씨만은 가려내어 뱉어 버리는 습성을 길들여야 한다.   수박은 유월에서 팔월 말까지가 제철이다. 온실 재배를 하면 삼사월에도 출시할 수 있지만 향과 수분이 적어서 제 맛이 나지 않는다.   수박 철이 짧다는 것은 이 과일의 특성이다 한여름 햇빛을 마음껏 흡수하여 무르익은 큰 수박덩어리-그 철은 삼개월이면 족하다. 호박같이 겨울을 넘기면 천대 받는다.  

뒷구멍으로 호박씨 깐다 란 말은 있어도 수박 씨 운운은 듣지 못했다.   시장에 수박이 없어지면 나의 한여름은 아주 간다. 금년같이 길고 무더운 여름, 땀을 흘리고 난 후의 수박 한 쪽은 감로 맛이다. 집에 돌아오면 수박부터 찾는다.

나는 더위를 타는 체질이다 외출하고 돌아오면 땀이 흠뻑 밴다. 그래서 누가 싫은 계절은? 하고 물으면, 곧 여름이지!하고 대답한다 그런 여름인데도 수박이 있어 느긋하다.   아름다운 것은 목숨이 짧다지만, 수박은 그 철이 짧아서 아름답다고 할까· 햇빛과 지열과 바람에 의해 꽉 찬 한 몸의 행복을 사람에게 아낌없이 주고 검은 눈물을 뽈뽈 흘리는 수박·.   다 줌으로써 큰 기쁨을 누리는 수박은 온덕의 과일이다 전기 냉장고안에 며칠이고 가두어 두면 슬픈 소리를 내지를지 모른다. 역시 우물 속에서 이리 구르고 저리 구르던 시절이 행복하였을지 모른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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