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로국밥

 

 

지금은 있는지 없는지 잘 모르지만 옛날 대구에서 살던 시절, 나는 ‘둥글관’이라는 따로국밥집을 즐겨 찾았다. 요즈음도 가끔 그때 생각이 나면 서울 시내에 있는 따로국밥집을 찾아가지만 아무래도 그때 그 시절에 맛보았던 미각은 영 되찾을 길이 없다.

나는 그토록 명성이 드높았던 국밥제조의 비결(?)같은 것은 모른다. 하지만 단골 고객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우선 그 집의 깍두기 맛이 천하일미라는 것이고, 또한 일년 내내 단 한번도 불을 끄지 않고 울궈내는 소뼈 국물에다가 듬성듬성 고기 저름을 얹어, 거무틱틱한 질그릇 뚝배기에 담아 내오는 고깃국은 문자 그대로 진국이라는 것이다. 그야말로 진수진액(眞髓眞液)인 셈이다. 거기에다 전가(傳家)의 비법을 다 동원하여 토란줄거리나 무?배추?시래기를 넣어 온갖 양념을 곁들여서 내는 국은 확실히 진미이면서도 진미였다. 값 또한 저렴한 실비가격이어서 부유한 자나 가난한 자나 허물없이 한자리에 앉아 서로 대접하고 대접받는 데도 별 부담이 없어서 좋았다. 더구나 숙취에서 깨어나기 어려울 때 텁텁한 막걸리 한 사발을 곁들여 들이켜는 해장국은 쓰린 속을 일시에 풀어주는 효험도 있었다.

그런데 아직도 풀리지 않는 의문은 왜 하필이면 ‘따로국밥’이라고 이름을 붙였을까 하는 점이다. 물론 그 집에는 밥 따로 국 따로만 나오는 것이 아니라 아예 국에다가 밥을 말아 주는 재래식 국밥도 있었다. 또한 곰탕이나 설렁탕집에서도 밥 따로 탕 따로 내놓는 경우도 있지만 ‘따로곰탕’ ‘따로설렁탕’이라는 이름은 없지 않은가. 내 생각으로는 아마 밥을 말아주는 국밥으로 시작하여 좀더 손님을 정중히 대접하려는 의도로 발전하다 보니 이렇게 변형되어진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그러나 아무려면 어떠리…. 결국 밥과 국은 이름만 따로일 뿐. 입 속에 들어가면 서로가 잘 어우러져 한결 조화로운 미각을 돋우어 주고 있음에야. 여기서 우리는 따로 따로라는 이질감보다는 몇 점의 고기와 선지, 양념과 국물, 밥과 깍두기 등이 혼연일체가 되어 동질화의 미각을 강하게 느끼게 해 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고 보면 따로국밥은 더욱 강한 동질의 미각을 깨우쳐 주는 역설적 제명(題名)인 것만 같아, 그 깊은 의미는 씹을수록 맛이 나는 진국의 묘미와도 같다 하겠다.

우리가 살아가는 일상생활 속에서 누구나 부담 없이 사먹을 수 있는 따로국밥을 들면서, 우리의 인간관계도 이와 같이 각기 다른 개체들이 어울려 서로 교류?화합?조화되어 갔으면 그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도 해본다.

그러나 시야를 밖으로 돌려보면 우리들의 생활양상은 너무나 따로따로 노는 이질(異質)인 것만 같아 참으로 안타깝다. 어느 저명인사가 지적한 말과 같이 기도 따로 생활 따로, 염불 따로 마음 따로, 말 따로 행동 따로, 담장 하나를 사이에 두고 이웃 따로 나 따로, 서로서로 화합하여 공생공존하자던 노사관계가 하루아침에 적대관계로 벌어져 노(勞) 따로 사(使) 따로 원한 어린 눈초리를 부라리는 오늘날의 세태를 바라볼 적에는 새삼 인생에 대한 회의마저 일게 된다.

교회나 사찰에서 이웃을 사랑하자고 그렇게 목청을 돋우던 사람들도 정작 생활현장으로 돌아와서는 갑자기 피가 냉각된 탓인지 사소한 쓰레기 한줌을 놓고도 이웃과 온갖 실갱이를 벌이는 것을 자주 본다.

또한 그렇게도 정의와 공명을 부르짖으며 깨끗한 선거를 통해 정직한 사람을 뽑자던 그 많은 지식인들도 막상 어느 입후보자가 뿌리는 지폐 몇 장과 향응 공세에 도취되어 그만 지조를 팔아 버리는 현실을 보고 있노라니 과연 인간의 양심은 몇 개의 얼굴을 가질 수 있는가 하는 의분심마저 솟아오른다.

어느 윤리학자는 “이 나라 국민의 약 9할 가량이 각기 한 가지 이상의 종교를 가지고 있는데 만약 그들이 믿는 종교 교리의 절반만이라도 실천에 옮긴다면 오늘날과 같은 무질서와 온갖 범죄행위는 일어날 여지가 없을 것이 아닌가”라고 개탄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 참으로 공감이 가는 말이었다.

교회나 사찰 안에서는 그렇듯 독실한 신앙인인 양 거룩한 언동만 하던 사람도 일단 밖에만 나가면 일반 불신자에 못지 않을 물욕추구(物慾追求)의 노예가 되어 가는 것을 보면 그야말로 ‘기도 따로 생활 따로’라는 말을 실감하게 된다. 모든 종교의 교리에는 ‘모르고 지은 죄보다 알면서 지은 죄가 더 크다’라고 했으니 정녕 이 나라의 종교인들은 너와 나의 구분 없이 모두 함께 통회(痛悔)하면서 이 세대의 아픔과 병폐를 치유하는 데 앞장서 나가야 하겠다.

모름지기 개과천선(改過遷善)에 대한 의무감은 교육자나 정치 지도자에 앞서 우리 종교인들이 그 선봉적 책임을 부여받고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하겠다. 평생을 두고 닦아온 수도의 길이 하찮은 세속적인 욕심 따위에 현혹되어 하루아침에 무너져서야 되겠는가.

종교가 지향하는 궁극적인 목적은 이타(利他)의 과정을 통해 평화를 이룩하고 그 화평 속에서 자기 구원을 실현하는 데 있는 것이다. 만약 종교를 단순히 천국이나 극락 가기 위한 수단으로만 삼는다면 이 또한 이기주의적인 신앙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참된 사랑의 실천은 희생이 전제되어야 하며 참된 마음의 화평은 욕망에 얽힌 집착의 끈을 끊어 버려야 한다.

일찍이 예수는 ‘이웃 사랑하기를 내 몸같이 하라’라고 하여 사랑의 실천을 강조하였고 석가는 ‘너와 나는 결코 따로 떨어진 별개의 존재가 아닌 한 몸이니 자타불이(自他不二)의 정신으로 모든 중생에게 자비를 베풀라’라고 설파하였다. 비록 시공(時空)을 격(隔)한 두 성인의 가르침이지만 이렇듯 지향하는 사상이 일치하고 있음을 보니 우리는 결코 따로이면서도 따로가 아님을 깨닫게 된다.

그러고 보니 지난 반세기 동안 이념과 제도를 앞세워 따로 살기를 고집해 온 우리의 남북관계도 민족 고유의 정서에 융합시키는 동질성 회복이 그 무엇보다 급선무라는 생각이 간절해진다.

마치 따로국밥이 따로가 아닌 융합으로써 그 진미(眞味)를 발휘하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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