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지 못할 순간들

 

-피로 물든 351高地를 생각하며-

 

때는 1952년 7월9일, 당시 육군 제 5사단 27연대 1대대 1중대 2소대장이었던 나는 동부전선 최전방 감제고지인 339고지 공격작전에 참가하고 있었다(高城地區 전투).

7월이면 한창 염열(炎熱)이 들끓는 때이지만 그곳 전선은 서늘한 가을을 연상케 할만한 계절이었다. 밤에는 내의까지 끼어입지 않으면 못 견딜 정도로 기온이 급강하 하기도 했다. 어쩌다가 밤비라도 맞으면 진흙구렁이 같은 참호 속에서 뼈 속까지 스며드는 오한을 느끼며 오들오들 떨어야만 했다. 이러한 추위는 그래도 견디어낼 수 있었지만 여기 저기 시체에서 흐르는 피가 빗물에 섞이어 썩는 냄새와 함께 코를 찌르는 데는 정말 견디기 어려운 고통이었다.

당시 나는 신임장교로 갓 부임한 소대장이었으니까, 무엇을 알았겠느냐 마는 아마도 우리 연대는 위력정찰의 임무를 띠고 적의 완강한 방어진지를 향하여 정면으로 공격을 했던 것 같다. 군단장께서 직접 연대 OP까지 나와서 진두지휘를 했던 것을 보면 우리들이 띤 임무는 막중했던 모양이다. 적정(敵情)을 전혀 파악할 수가 없어서 다소 우군의 피해가 있더라도 적의 포로를 한 명이라도 잡으면 큰 성과가 아닐 수 없었다.

나는 7월 9일 소대원 39명을 이끌고 처음으로 이 339고지 공격을 시도했다. 새벽 2시. 예명공격의 임무를 띠고 LC(공격개시선)를 넘어서 새벽 4시경에 돌격선에까지 도달해보니 이미 날은 훤하게 밝아오는 것이었다.

우리는 돌격명령을 기다리며 8부능선까지 올라가 대기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피아간의 포탄이 사정없이 우리를 뒤엎어 옴으로 적의 진지에 돌격을 감행해 보지도 못한 채 막심한 피해부터 입어야만 했다.

당시 1소대와 2소대는 주공, 3소대는 예비대였는데, 얼마나 치열한 포격을 받았던지 우리 소대는 거의 다 전사하고 39명중 고작 7명만이 살아남을 정도였다. 우리 소대뿐 아니라 다른 인접부대도 꼭 같이 당했으니까 우리 연대는 거의 전부가 막대한 피해를 입은 것 같았다.

어느덧 시간은 오전 5시쯤 되었는데 가만히 누워서 고개를 들고 쳐다보니 적과의 거리는 불과 1백 미터도 안 되어, 적 방카 속에서는 고개를 들고 서로들 이야기를 나누는 괴뢰군들의 모습까지 볼 수 있었다.

당시 가장 비통했던 일은 내가 평소 친동생처럼 아끼던 이진표 연락병이 포탄에 맞아 온몸이 공중으로 붕 뜨더니 그대로 떨어지며 "소대장님!"하고 고함을 지르는 것이었다. 이 소리를 들은 괴뢰군은 우리를 내려다 보면서

"너의 소대장은 이미 죽었다. 손들고 올라오면 살려준다."

하며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것이 아닌가.

나 또한 위험을 무릅쓰고 포복으로 접근하면서 압박대로 이일병의 상처 부위를 눌렀으나 이미 복부에서 쏟아지는 내장과 함께 유혈이 낭자하여 나의 서투른 간호는 한낱 순간적인 위안에 불과했고, 이일병은 모기소리처럼 "소대장님! 감사합니다."하면서 숨져 가는 것이었다.

원래 상부의 명에 의해 내무감시당번 한 사람은 남게 되어있어 이일병을 내가 지명하여 남기려 했으나 굳이 나를 따라가겠다고 해서 데리고 온 것인데 이렇게 죽고 보니 이는 마치 나를 대신해서 죽은 것만 같아 더욱더 애통한 마음 금할 수 없었다.

그러나 언제까지나 비통에 잠기고만 있을 수 없는 일. 나는 어떻게든 행동을 취해야겠는데 참으로 당시의 상황으로서는 진퇴유곡이 아닐 수 없었다. 인접해 있는 1소대도 이미 후퇴하고 없는 터라 더이상 견딜 수 없어 우리는 골짜기로 내려와 피신하고 있노라니 계곡의 물은 정말 핏물이 섞여서 흐르고 있었다.

11시까지 피신했다가 오후 6시쯤이나 되어 중대본부에 도착해 보니 이미 중대에서는 전사보고가 올라간 후였다. 생존자는 불과 7명이었고, 중대장은 죽었던 소대장이 다시 살아왔다고 얼싸안으며 반가워 하기도 했다.

모든 긴장이 풀리고서야 비로소 나도 부상을 당한 것을 알 수 있었다. 팬티와 내의, 작업복이 범벅이 된 피에 엉켜붙어서 서로 떨어지지도 않아 정확한 상처부위도 모르는 채 의무중대로 후송을 당하여 건빵 한 봉지와 물 한 잔을 들고는 그대로 잠이 들어 그 전후사정은 전혀 알 수조차 없었다.

그러나 이튿날 의식을 회복했을 때 나는 부하의 원수를 갚지 못하고 이대로 물러설 수는 없다며 한사코 후송 당하는 것을 반대하면서 원대복귀를 원했다. 주위사람들은 나의 이러한 행동을 보며 의아해 하기도 했지만 나는 당시 남달리 순진했고 아울러 친동생처럼 아끼던 연락병의 죽음과 이에 대한 적개심이 걷잡을 수 없이 용솟음쳐 올랐던 것 같다.

이렇게 하여 나의 소원은 이루어져 두 달만에 치료를 완료한 후 다시 원대복귀하게 되었는데 당시 대대장은 나의 이러한 행동이 기특했던지 특별히 우대한다면서 대대본부 중대장으로 임명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한 달쯤 지나자 상황이 돌변하여 나는 다시 2대대 8중대 1소대장(기관총소대장)으로 출전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우리 전면에 있는 351고지 탈환작전에 참가하게 되었는데 이 351고지는 며칠전 저들 괴뢰군의 공격으로 우군 3대대 9중대가 중대장이하 전원이 옥쇄한 고지였다.

이 351고지는 동부전선 전방고지로서 일기 청명할 때는 금강산 해금강까지 능히 바라볼 수 있는 감제고지다. 그러니까 금번 우리가 실시하는 공격은 351고지에 대한 재탈환 역습작전이었던 것이다. 더군다나 이번 공격은 주간공격이었기 때문에 피아공방전의 치열함이란 참으로 필설로는 형용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피아의 화력이 얼마나 치열했던지 평소 파놓았던 교통호가 모조리 티끌로 매몰되어 무릎까지 빠져 들어갈 지경이었다.

아침부터 시작한 공격이 해질 무렵까지 계속되어 드디어 적을 격퇴하고 351고지는 재탈환 되었지만, 고지에 즐비하게 누워있는 피아의 시체는 발디딜 틈조차 없을 정도였다. 총알을 정통으로 맞고 그대로 숨진 사람은 그래도 나은 편이었다. 포탄에 육신이 갈갈이 찢기어 형체도 없이 딩구는 살점이나 두개골, 내장들을 볼 적에는 참으로 처절을 극한 장면이 아닐 수 없었다.

나도 그때 기관총 소대장으로 우군을 엄호사격 하다가 적의 눈에 띄었던지 직격탄을 맞아 고막이 파열되기도 했다(지금까지 오른쪽 귀가 멍멍하여 시계소리나 작은 소리를 듣지 못하는 것은 그때 입은 부상 때문이다.).

그때 우리가 사격한 기관총은 수냉식 기관총이었는데 얼마나 쏘아댔던지 자칫하면 총열이 달아올라 휘어질 염려까지 있어 모두들 소변을 탄창통에 받아 모아 그것으로 총열을 식히면서 다시 사격하기도 했다.

그날 밤 우리는 재탈환한 351고지에서 하룻밤 지새게 되었는데, 진지구축을 새로하면서 즐비한 시체를 치울 여유도 없이 그대로 섞여서 누어야 할 판이었다. 어떤 시체 하나는 미처 숨이 덜 끊어져 있길래 참호 속으로 밀어 넣으며 행여나 살아날까 간호해 보았지만 곧장 죽어버리는 병사도 있었다. 미처 그 시체를 치울 여유도 없이 그날 밤은 같이 데리고 누워 지새기도 했다. 비록 승리는 했지만 문자 그대로 상처투성이의 영광이었다.

그리고 내가 경험한 바로는 병사들이 죽을 때 흔히 어머니만 부른다 했지만 우리 소대의 경우는 한결같이 죽을 때 "소대장님!"하고 나를 먼저 불렀던 것을 잊을 수 없다. 그 애절한 목소리. 외마디 절규는 아직도 나의 귀에 생생히 들려 오는 것만 같다.

이러한 일들은 그때까지만 해도 순진무구했던 내가 그 무슨 위세보다는 병사들과의 평소 맺어진 인간적인 유대가 피맺힌 정으로 승화되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아무튼 꼭 같은 생사의 고비를 넘기면서도 유독 나만 살아남았다는 것이 행운이라기보다는 먼저 간 전우들에게 송구스러울 뿐이다.

나는 아무래도 그날 이후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의 생애가 모두 덤으로 산 것만 같아 항시 양심의 가책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삼가 미처 피어보지도 못하고 산화한 꽃봉오리들의 명복을 빌면서 이 글을 맺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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