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아버지의 마음

 

환갑 지나서 본 첫손자의 백일잔치는 비록 변변치는 못했지만 우리 가족들의 마음은 그지없이 즐거웠다.

아들내외를 혼인시킨 지도 어언 5년.

그동안 며느리의 계속되는 학업과 아들의 군복무 등으로 인한 부득이한 탓인지는 모르지만 나로서는 남들처럼 적기에 손자를 안겨주지 않는 자식이 적잖이 원망스럽기도 했다.

이렇듯 남몰래 속앓이를 하면서 초조하게 기다리던 만득(晩得)의 손자였으니 그 누구보다 반갑고 기쁠 수밖에…. 그러나 이렇게 기쁜 날 사돈 내외(손자의 외조부모)가 자리를 함께 할 수 없었음이 못내 아쉬웠다. 여하튼 인간의 종족 번식 본능은 이렇게 간절하고 절실한 것일까. 참으로 손자를 본 할아버지의 심정이 아니고서는 누구도 형언하지 못할 기쁨이었다.

훤출히 드러난 이마와 초롱같이 반짝이는 눈, 그리고 잘 익은 복숭아같이 탐스러운 양볼과 새끼 제비의 그것보다 더 귀여운 입, 어디하나 신비스럽고 사랑스럽지 않은 것이 없는 손자의 얼굴은 문자 그대로 황홀경이었다.

집안 가득히 모여앉은 일가친척들도 음식보다는 아기의 모습에 더 관심이 가는 듯, 서로 번갈아가며 손자의 얼굴에서 혈통의 닮은꼴을 찾아내기에 여념이 없었다.

이마는 할아버지를 닮고 코는 할머니를, 눈은 어미를, 양 볼은 아비를 닮았다는 총평과 함께 이마와 눈은 외할아버지를 닮았고, 양 볼과 입은 외할머니를 닮았다는 각론평도 나왔다.

사실 손자를 출산할 당시에는 공관장회의 때문에 귀국한 사돈 내외와 그 기쁨을 함께 나누었는데 그때의 사돈 내외와 우리 내외는 서로 갓난아기의 얼굴에서 상대의 모습을 확인하고 창조주의 오묘한 섭리 앞에 새삼 경탄의 염을 금치 못한바 있다.

일찍이 성현의 말씀 가운데 '마음에 없으면 보아도 보이지 않는다(心不在馬 視面不見)'라는 구절도 있듯이 외할아버지의 모습을 포개놓고 보면 외할아버지를 닮은 것 같고, 외할머니의 모습을 그리면서 들여다보면 영락없이 외할머니를 닮은 것 같다.

아비를 대입시켜 보면 아비를, 어미를 대입시켜 보면 바로 어미를 닮은 것 같다. 그야말로 이리 보면 이 모습 같고 저리 보면 저 모습 같으니 정녕 손자의 얼굴은 만물상 바로 그것이었다.

따지고 보면 손자한테는 나의 핏줄이 사분의 일 정도만 섞여 있을 뿐인데 아들을 보았을 때보다 훨씬 더 귀엽고 사랑스럽게 느껴지는 까닭은 무엇일까. 아무리 자문자답해 보아도 그저 불가사의할 뿐이다. 아마도 이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난문(難問)과 난답(難答)은 '아들이 더 좋으냐, 손자가 더 좋으냐'에 대한 대답일 것이다.

논리적으로 따져보면 손자는 아들의 아들이니까 아들과 꼭 같은 혈연적인 연대(連帶)에 끌리어 자별한 사랑도 하기 마련이지만 무엇보다도 노경에 접어든 할애비의 입장에서는 늘 품안에 안고 지내는 아기자기한 정이 깃들어 아무래도 손자가 앞서는 것 같다.

그것은 또한 옛부터 우리 조상들이 아들에 대한 정을 의도적으로 무디게 하려는 절제된 행위가 전통화 되면서 하나의 관습으로 굳어져 왔기 때문이기도 하리라. 즉 아들에 대해서는 단순한 사랑에 앞서 장차 가업을 승계시킬 의젓한 모범 가장을 만들어야 하기 때문에 맹목적인 자애심(慈愛心)보다는 적절한 억제력으로 균형잡힌 인격형성에 더 주안(主眼)을 두었던 것이다. 따라서 엄부(嚴父)라는 명제 때문에 자기 부모 앞에서는 함부로 자식에 대한 애정표시도 할 수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손자에 대해서는 이러한 굴레에서 벗어난 할아버지로서 마음껏 애정 표시를 하면서 응석도 받아 주었을 것이다. 그래서 옛 선비들도 자식에게는 엄격한 규범을 앞세웠지만 손자 사랑에는 별 구애를 받지 않았던 모양이다.

그러나 '손자를 너무 귀여워하면 할아버지 상투도 끄어든다'라는 경구도 있듯이 오늘날 아이들에 대한 지나친 사랑과 과잉보호의 부작용이 청소년의 탈선으로 이어지고 있는 현실을 목도할 때, 이제 손자를 둔 할아버지들도 맹목적인 무한정의 사랑에서 벗어나, 예절바르고 공덕심(公德心) 강한 후손육성을 위해 새로운 역할을 담당해야 할 것으로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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