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경환(劉庚煥)   아호 : 솔내

 

               

Ⅰ. 약력

1936년 유한식(劉漢植)과 김순학(金順鶴) 사이에 7남매 중 4남으로 황해도 장연군 대구면 송천리태어남.

본관 강능. 아호 솔내.

1945년  맏형의 상급학교 진학에 따라 교육도시로 옮겨옴. 8·15광복을 경기도 개성(開城)에서 맞음. 개성 궁정초등학교와 선죽초등학교를 다님.

1950년  6·25가 터지자 서울에서 형 셋이 모두 군에 입대함. 셋째형이 배속된 3사단이 인제에서 포위되자 형과의 군사우편이 끊어짐. 이 경험을 소재로 동시를 써서 뒷날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입상함. 6·25가 글을 쓰게 된 동기가 됨.

1951년  1·4후퇴의 기미가 보이자 남은 가족은 대구로 피난감. 대구의 서울 피난 연합중학교에 등록. 중학교 2학년 때 6·25로 학업이 중단되었기에 정직하게 중2과정에 다시 등록하였더니 동기생들은 3학년에 등록하여 급우보다 1년이 늦어짐. 이로 말미암아 동창생들이 늘어남. 작가 이효석(李孝石)의 아드님 이우현(李禹鉉)과 작가 박영준(朴榮濬)의 아드님 박승렬(朴勝烈)과도 급우로 사귀게 됨. 이들과 나란히 대구 천막 가교사에 앉아 시인 김소영(金素影) 선생의 문학강의를 들음.

1952년  대구에서 아동문학가 이원수(李元壽)가 주관한 월간지 「소년세계」의 제1회 소년세계문학상에 동화 「오누이 가게」가 당선됨. 상으로 받은 5돈 금메달을 고등학교 등록금으로 씀. 월간지 「새벗」과 「학원」에 글을 투고하여 발표함.

1953년  부산으로 이주하여 영도에 개설된 임시 천막 학교 경복고등학교(景福高等學校)에 들어감. 부산 서면의 부전동에서 영도까지 걸어다님. 서울이 수복됨에 따라 서울에 올라와 원효로 집을 개축하고 본교에 복학함.

1954년  대한기독교서회가 발간하는 월간 「새벗」사 주최 제1회 문예상에 동시가 당선. 월간 「학원」지의 제1회 학원문학상 받음.

1955년  제2회 학원문학상을 받음. 「학원」 잡지의 문예란을 통해 이름을 알게 된 제주의 김종원(金鍾元)과 목포의 정규남(丁奎南)과 함께 학생시집

『생명의 장』을 3인집으로 (민성문화사) 펴냄. 이때 「학원」지의 시작품 선자였던 조지훈(趙芝薰)의 서문을 받았건만 시집 인쇄가 목포에서 이루어졌기에 수록 못하고 육필원고로 보관하고 있음.

1956년  경복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연희대학교 정법대학 정치외교학과에 입학함. 연세문우회에서 스승 박두진(朴斗鎭)을 만남. 연세대학교 교내신문 연세춘추의 학생기자 생활도 시작함.

1957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응모, 동시 「아이와 우체통」이 당선작 없는 가작으로 입상함(선자 윤석중·어효선). 이로써 아동문학계에 등단함. 같은 해 「현대문학」지 11월호에 시 「바다가 내게 묻는 말」이 초회 추천됨(박두진 천).

1958년  「현대문학」에서 3회 추천을 마치고 시단에 등단함(천자 박두진). 이때 함께 추천과정을 밟고 3회 추천을 마친 시인이 정공채(鄭孔采) 박희연(朴喜演) 시인임. 초회 추천 6개월 만인 4월호에 완료된 것은 처음 있는 일이라함. 나머지 추천 작품은 「석화(石花)」, 「혈화산(血火山)」.

1959년  대학 졸업 1학기 전에 월간 「사상계」사에 공채 1기로 입사함. 졸업학점 취득이 거의 끝난 상태여서 가능했음. 9월 입사발령이 59년 11월호 「사상계」지면에 사령으로 발표됨. 한국시인협회 회원으로 가입함. 이후 한국시인협회 중앙위원·기획위원·심의위원을 역임함.

1960년  2월에 연세대학교 졸업. 「사상계」사 기자신분으로 4·19를 맞고 취재함. 같은 해 7월에 「사상계」 발행인 장준하(張俊河)의 처제인 김은숙(金銀淑)과 서울 명동 성당에서 관면혼배로 결혼.

1961년  5·16에 대해 「사상계」가 비판하자 수난이 시작됨. 장녀 사라(思羅) 태어남. 군에 입대함. 육군 병참학교를 거쳐 육군본부에 배속됨. 정훈감실에서 육군신문을 편집 제작함.

1962년  차녀 혜라(惠羅) 태어남.

1963년  육군본부에서 유엔군사령부로 전속됨. 「자유의 벗」이라는 월간지의 취재 편집에 참여함. J.D. Salinger의 『The Catcher in the Rye』를 『호밀밭의 파수꾼』이라는 책제로 바꿔 번역, (평화출판사 사장 허창성許昌成) 출판함.

1964년  육군에서 36개월 복무를 마치고 만기 제대함. 월간 「사상계」사에 복직함.

1965년  「사상계」 편집부장 피임(30세). 장남 태균(泰均) 태어남. 시작(詩作)보다 사회참여적인 글을 많이 씀.

1966년  첫 동시집 『꽃사슴』을 (숭문사) 펴냄.

1967년  장준하(張俊河) 발행인이 국회의원 겸직금지 조항에 걸려 사임하고 「사상계」의 종로1가 한청빌딩 시대가 끝남. 새 발행인 부완혁(夫琓爀) 체제에서도 10개월간 편집부장직을 수행함. 이 시절에 황활원(黃活元), 김중위(金重緯)와 함께 근무함. 일과 뒤 그리고 일요일에 철기 이범석(李範奭)의 장충동 자택에서 이범석의 자서전 집필을 위해 유무정(柳武正 MBC 프로듀서)과 함께 회고담을 3개월간 녹음함. 이를 정리하여 자서전 『우둥불』 원고로 집필함. 이 사실을 이범석(李範奭)은 자서전 끝에 밝혀 놓았음.

1968년  부완혁(夫琓爀) 발행인에 의해 「사상계」 편집부장 직위에서 직위해제 됨. 이 사실을 조선일보 등 일간신문에 게재된 전5단 광고로 인지함. 개별 통고를 받은 사실이 없음. 부(夫)발행인은 「사상계」원고를 가지고 심화인쇄소로 가서 제작하면서 본인과의 면담을 기피하였음. 그 이후 구속중 병보석으로 풀려난 장준하(張俊河)의 자서전 원고 집필을 위해 3개월 동안 서울 조광현(趙光賢) 내과의원에 입원 중인 장준하(張俊河)로부터 집필 내용을 구술받아 정리함. 이 원고로 자서전 『돌벼개』가 출판됨(『돌벼개』의 원고는 「사상계」에 연재되었던 회고록과 다른 것임). 같은 해 9월에 중앙일보사 홍성유(洪性유) 부사장으로부터 중앙일보사 「월간중앙」 편집에 참여 권유를 받음. 그러나 9월에 조선일보사에 입사함. 조선일보사의 「사상계」 인수계획이 추진되었으나 성사되지 못함. 그 대신 격조있는 주간지 「주간조선」 창간에 참여함. 최석채(崔錫采)의 시론 「민족의 동질성 회복이 급하다」는 논문을 주간조선 창간호 제1면에 게재하는 식의 편집을 함. 이후 22년 동안 조선일보사에 근무함. 주간조선 편집실장, 조사부 차장, 문화부장(석), 문화부장, 논설위원, 소년조선일보주간, 논설위원 겸 조선일보 70년사 편찬실장을 역임함.

1969년  첫 시집 『감정지도』 (삼애사) 펴냄.

1970년  「현대문학」사의 현대문학상을 받음.

1971년  첫 동화집 『오누이 가게』를 (대한기독교서회) 펴냄.

1972년  위인전 『안중근』을 (태극출판사) 펴냄.

         시 작품 「산노을」이 박판길(朴判吉) 작곡으로 발표되어 한국 가곡에 선정됨. 미국 하와이대학교 병설 동서문화원(East-West Center)의 장학금(Jefferson Fellowship)을 받음. 현직 기자(문화부장)로 유학하여 신문학을 공부함.

1973년  귀국하여 문화부장에 복직함.

1974년  첫 수필집 『길에서 주운 생각들』을 수필가 박연구(朴演求)의 주선으로 (범우사) 펴냄. 한국뇌성마비복지회 창립이사로 취임하여 5년간 재임함.

1975년  조선일보 논설위원에 피임(40세). 조선일보 1면 컬럼 「만물상(萬物相)」을 집필함. 5년 동안 씀.

1976년  위인전 『퇴계 선생·율곡 선생』을 (동서문화사) 펴냄.

1977년  해외 취재 및 여행기를 수록한 기행에세이집 『유럽의 국제열차』를 (관동출판사) 펴냄. 수필집 『새끼 손가락의 약속』을 (일지사) 펴냄.

1978년  조선일보에 집필한 1면 컬럼 「만물상」을 간추려 에세이집 『70년대 변주곡』으로 (평화출판사) 펴냄. 또 그 뒤의 것을 간추려 『툇돌에 낙수』로 (태창문화사) 펴냄. 그동안 사설로 게재 발표된 문화시론 격의 글을 『유경환의 기침소리』로 (도서출판 까치) 사장 박종만朴鍾萬이 펴냄. 수필집 『환상의 겨울, 눈밭의 발자국』을 (연희출판사) 펴냄.

1979년  대한출판문화협회 출판문화저작상을 받음. 미국 미시간 대학교 (University of Michigan)에 풀브라잇 장학금으로 유학이 결정됨. 수필문우회에 참여 정기모임에 참석함. 조선일보 사장 방응모(方應謨)의 약전을 10개월 동안 자료 수집하여서 집필하다.(1932-1950년 사장재임기간 친지 가족 및 신문사간부 증언 녹음으로). 이 원고로 이흥우(李興雨) 출판국장이 「계초 방응모전」을 조선일보 출판국에서 발간하다.

1980년  미시간 대학교에 유학. 매스커뮤니케이션학과의 피터 크라크(Dr. Peter Clark) 교수가 공동연구자로 선임됨. 사회교육기능으로서의 미디어 활용 방안과 그리고 정서효과에 대해 연구함.

1981년  귀국하여 조선일보사 소년조선일보 주간(부국장 급)에 취임. 에세이집 『어린이를 위한 에세이』를 교육출판사 (배영사)에서 펴냄. 수필집 『나무의 영혼』을 (연희출판사) 펴냄. 대한민국 문학상(아동문학 부문)을 문화의 날에 받음. 사회복지법인 홀트아동복지회 이사로 선임. 이후 18년 동안 재임.

1982년  한국간행물 윤리위원회 심의위원 위촉. 2기 연임.

1983년  조선일보 논설위원으로 재피임. 장녀 결혼. 모친 별세. 개신교에서 천주교로 개종하고 영세받음. 세레명 크레멘츠. 선조 가운데 유진길(劉進吉) 아우스팅 순교자가 있음(원래 출생지 황해도 장연군 대구면 송천리는, 우리나라에서 개신교 예배당이 처음 세워진 곳이었고 선교사들의 별장이 많았던 곳임). 한국공연윤리위원회 심의위원 위촉 2기 연임됨. 천안 독립기념관 설립 추진위원회 운영 및 조경분과 자문위원 위촉.

1984년  청소년을 위한 성장소설 「종이배」가 신지식 공저 『하얀 길』에 수록되어 (금성출판사) 발간됨. 시 작품 「민들레」가 김동진(金東振) 작곡으로 가곡에 선정됨.

1985년  우리 고전찾기 운동의 하나로 전개된 번역사업에 참여하여 고전 『삼학사(三學士)전』을 (민족문화추진회) 펴냄. 위인전 『김구』를 (견지사) 펴냄. 연세대학교 대학원에서 매스커뮤니케이션 연구로 박사학위 과정을 마침(석사과정은 행정대학원에서 1982년에 마침).

1986년  부친 별세. 동포(東圃)문학상 받음. 교육에세이집 『한 그루 꿈나무를 위하여』를 (동화출판공사) 펴냄. 수필집 『아픔 끝이 사랑인 것을』 (도서출판 써레) 펴냄. 수필집 『눈으로 말하는 것』을 (범우사) 펴냄. 열 번째 해외여행을 함. 한국영화진흥공사의 우수영화 선정위원에 위촉.

1987년  논설위원 겸직 조선일보사 70년사 편찬실장에 피임. 70년사를 쓰기 시작함. 교육에세이집 『사랑의 나침반』을 (써레) 펴냄. 시 작품 「유월 나비」가 박판길(朴判吉) 작곡으로 KBS위촉 가곡으로 선정됨. 한국잡지협회 우수잡지 선정 심사위원에 위촉 5기 연임.

1988년  장남 결혼 자부 이선혜(李善惠).

1989년  연세대학교 대학원에서 「한국의 일간 소년 신문의 사회적 기능에 관한 연구」 논문으로 언론학 박사학위를 받음. 연세대학교 언론홍보대학원에 시간강사로 출강을 시작함. 차녀 결혼. 이주홍(李周洪)아동문학상을 받음. 교육에세이집 『사랑의 무릎학교』를 (동화문화사) 펴냄.

1990년  3년 동안의 자료조사, 수집, 집필 과정을 거쳐 『조선일보 70년사』를 탈고함. 3권으로 (조선일보사) 발간함. 사사편찬위원회가 제3권 후기에 집필자임을 밝혀 놓았음. 제1회 박홍근(朴洪根)아동문학상을 받음.

1991년  현대(現代)그룹이 설립한 문화일보의 창간에 참여함. 조선일보사를 떠나 문화일보사로 전직함. 문화일보 논설위원(국장급) 취임. 수필집 『누워서 들어야 들리는 이야기』를 (대교출판사) 펴냄. 어린이 정서교육서 『글짓기의 첫걸음』을 (대원사) 펴냄. 대한민국 동요대상을 받음. 계간 수필전문지 「창작수필」지에 창간호부터 수필을 기고함. 계간 수필전문지 「현대수필」에도 기고하기 시작함. 한국방송위원회 제도개혁위원회 위원 위촉. 조병화(趙炳華) 시인의 편운(片雲)문학상 운영위원회 위원 위촉.

1992년  문화일보사 편집국장(직무대리)에 취임. 같은 해 논설위원에 재피임. 위인전 『도산 안창호 겨레의 스승』을 (흥사단출판부) 펴냄.

1993년  한국방송위원회 심의위원 위촉. 한국간행물윤리위원회 서평위원 위촉 2기 연임.

1994년  문화일보 논설위원실 실장 취임. 서울특별시 문화예술위원 위촉. 한국방송위원회 연예오락부문심의위원장 선임.

1995년  서울특별시 문화상 심사위원 위촉. 서울특별시 시정자문위원 위촉. UNEP한국위원회 이사 위촉. 2기 연임. 서울 서대문 구치소 자리에 독립공원 조성 계획 및 영등포구 문화예술의 집 공원 조성 계획 추진에 참여.

1996년  문화일보 논설주간 피임(이사 대우). 부천시 원미구 역곡2동에 도서시설을 마련한 한국아동문학교육원을 설립함.

1997년  문화일보사에서 이사대우 논설주간으로 정년 퇴임함(호적상 만 65세). 연세대학교 사회과학대학 신문방송학과에서 강사로 출강 교단에 섬. 추계예술대학교 문예창작과에 대우교수로 출강. 서울특별시 세종문화회관 개편추진위원회 위원 위촉.

1998년  대산문화재단 창작지원 심사위원 위촉 4기 연임. 수필 전문지 5종에 발표했던 작품 80여 편을 문예진흥원 창작지원금으로 수필집 『나무호미』로 (세손) 펴냄. 문화일보 논설고문으로 문화컬럼 「회전목마」를 격주로 1년간 집필. 계간 아동문학지 「열린아동문학」 주간 취임.

1999년  세브란스에서 심장우회수술 받음. 20여 년 간 살던 부천의 역곡을 떠나 일산으로 임시 이주 요양함. 재단법인 세종문화회관 이사에 선임. 조선일보, 동아일보의 신춘문예 동시 심사위원 위촉. 한국가톨릭 문학상 심사위원 위촉.

2000년  한국 아동문학 교육원 원장 취임. 대산문화재단 자문위원 위촉. 한국문화정책개발원 문화기반시설평가위원 위촉 3기 연임. 조선일보 신춘문예 동시 심사위원 위촉. 「계간수필」지 편집위원 위촉.

2001년  만 65세로 5년 동안의 대학출강을 끝냄. 조선일보 신춘문예 동시 심사위원 위촉.

2002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동시 심사위원 위촉. 동아일보 신춘문예 아동문학 심사위원 위촉. 수필선집 『초록 비』를 (선우미디어) 펴냄. 추계예술대학교 문창과 초빙교수로 재출강.

2003년  제 15회 정지용 문학상 수상. 수상작 시  "낙산사 가는 길·3"

2006년 수필집 『염소 그리기』(세손) 펴냄.

경기도 고양시 일산구 마두 2동 강촌마을에 거주

 

 

 Ⅱ. 앨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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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우회 10주년 기념국제 세미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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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두진 선생님과

어느 한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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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두진 선생님과

모교 연세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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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시"의 작가

 게오르그와 함께

 

 Ⅲ. 자필 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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