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모촌(尹牟邨)

 

                 

Ⅰ. 약력

1923년  8월. 휴전선 속 군사분계선 북쪽으로 들어간 경기도(京畿道) 연천군(漣川郡) 왕징면(旺澄面) 기곡리(基谷里) 637번지에서, 아버지 윤상영(尹相榮) 어머니 해주(海州) 최(崔)씨 사이 3남 2녀 중 막내로 태어남. 본명 윤갑병(尹甲炳).

아버지는 젊어서부터 외지로 나돌아, 향교(鄕校)의 直員:지금의 전교(典校)를 지낸 할아버지의 영향을 받으면서 자람.

1940년대로 접어들면서, 일제(日帝)의 침략전이 가열되어 전쟁터로 끌려가거나 탄광 노무자로 징용당해야 했음.

1944년  연천공립농업실수학교를 나와 경기도 고양군의 국민학교에 취직, 징용을 피함.

1945년  8월. 광복을 맞으나, 분단의 38선으로 이산의 한(恨)이 시작됨.

1946년  12월. 미군정(美軍政)하 좌우익 갈등 속에서, 바른말 한다는 죄로 재판도 없이 구금되었다 풀려나, 부천군으로 이동됨.

1947년  7월. 고향을 찾아 사선(死線)인 38선을 세 번째로 넘었다가 북쪽 경비병에게 잡혀 20일 간 전곡(全谷) 내무서에 구속되었다 풀려남.

1950년  12월. 6·25전쟁에 중공군이 개입. 이에 따라 국민방위군 대원이 되어, 서울서 마산까지 천리길을 걸어 내려감..

1954년.  피난지 대전지역에서 떠돌며, 왕골수예품공장, 농촌의 농삿일, 양계장, 정미소 등에서 노동을 함. 호서 문학회 회원.

1955년  10월. 충북 청원군의 국민학교로 복직.

1958년  5월. 교육언론에 군교육청의 교과서 공급비리를 논한 죄로 영동군 산골로 유배됨. 이승만 독재정권의 부패로, 교육현장에까지 부정선거가 노골화하던 때임.

1958년  7월. 미지의 어린이 잡지사로부터 초빙을 받아 상경, 교육언론지에서 일함. 1년 뒤 출판사로 옮김.

1959년  3월. 소설가 정구창(鄭求昌)의 소개로 아내 조정복(趙廷福)을 만나, 함석헌(咸錫憲) 선생 주례로 결혼을 함. 아내의 나이 25세, 본인은 36세. 2남 2녀를 둠.

1961년  6월. 출판사를 그만 두고, 교육잡지를 펴내는 교직단체로 옮김. 특별법인이 된 교직단체(대한교원공제회)의 관리과 책임자로 일함.

1972년.  공화당 시절 정치권력을 업고 들어온 이사장의 비리와 맞서다 관리 과장직에서 쫒겨남.

1978년.  느타리버섯 재배를 시험삼아 해봄.

1979년  1월. 한국일보 신춘문예 수필부문에 「오음실주인(梧陰室主人)」 당선. 이후 수필집 『정신과로 가야할 사람』 『서울뻐꾸기』, 선집 『산마을에 오는 비』 등을 펴냄.

1984년  7월. 좌측 눈의 망막이 떨어져 수술을 함.

1991년  6월. 7시간에 걸쳐 위 십이지장 담낭 췌장 등 대수술을 한 아내가 1개월만에 기적같이 회생함.

1992년  5월. 25년 간 18평짜리 단독주택에서 붙박혀 살던 서울 서대문구 홍은동 오음실(梧陰室)을 떠나 과천으로 옮김.

1993년  5월. 경기도 군포시 산본으로 다시 옮김.

1996년  8월. 수필의 실기와 이론서 『수필문학의 이해』 『수필 쓰는 법』을 개정, 『수필 어떻게 쓸 것인가』(을유문화사)를 펴냄.

1997년  1월. 녹내장으로 우측 눈 수술.

1999년  5월 문고판 선집 "오음실 주인"(선우미디어)출간

2000년  4월 신도시 일산으로 옮김.

2005년 5월 7일 지병으로 운명하심.

 

Ⅱ. 앨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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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실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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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손자와 함께

 

 Ⅲ. 자필 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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