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곡의 물소리가 진리의 말

 

  올봄은 예년에 비해 일찍 올 모양이다. 절기로 봄에 들어서는 입춘은 벌써 지났고 우수도 이월에 겹쳐 있다. 머잖아 겨우내 얼어 붙었던 산 계곡과 냇가에서 녹아 내리는 물소리로 대지가 깨어나듯 하면 어느새 양지 바른 남향으로 푸릇푸릇 새순이 돋아날 것이다.

  햇살은 갈수록 온기를 더해갈 것이고 낮길이도 점점 길어져 갈 것이다. 생명 있는 것들이 긴 침묵의 잠에서 활기를 띠고 삶이란 얼마나 값진고 아름다운 것인가를 느끼는때, 한두번 겪는 봄이 아닌데도 여전히 새롭고 설레이는 것은 봄이 죽음에서 부활하는 생명의 기쁨을 담고 있는 계절인 까닭이다.

  그러나 이 세상에는 그 어느 것이 좋기만 한게 없는 것인가. 햇살이 맑고 밝아지는 대신 대지를 스쳐 부는 바람은 겨울보다 그 느낌이 거칠다. 봄바람이 주는 말의 뉴앙스와는 달리 몸속을 파고 드는 바람기는 얼음을 스친 듯 차고 시리다.

  무엇이든 새롭게 변신 하려면 스스로의 아픔과 내적인 갈등을 겪어야 하듯, 새로운 계절의 문이 열리는 시절임에 변혁의 몸부림이 없을 수 없다. 죽음과 절망으로 상징되는 겨울의 긴 적막을 깨고 생명의 환희를 노래하는 봄이고 보면 그런 아픔쯤이야 오히려 당연한 일, 바꿔야 할 때가 되면 바꾸는 것이 자연의 이치라고 해도 거기엔 어쩔수 없이 변화하는 아픔이 따르는 것이다.

  생명들은 환경의 변화에 본능적으로 거부감을 느낀다고 한다. 동물들은 낯선곳에서는 공포를 느끼기 마련이다. 하지만 변해야 할 때 변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는 것 또한 생물이다. 자연은 영영 그대로인 것 같아도 긴 세월을 두고 보면 역시 변해가고 있는 것이며 자연을 떠나 생존할 수 없는 생물은 자연과 더불어 변하지 않으면 안되기 때문이다. 결국 우리가 살아 남으려면 생물학적으로도 변해야 하는 운명을 안고 있는 것이다.

  우리 동양인들은 자연을 제쳐두고 삶 자체를 생각할 수 없었다. 자연과 인간을 하나로 보고 인체구조 까지도 자연과 같은 맥락으로 보려 했다. 그 좋은 예가 바로 침술(鍼術)이다. 서양의학적으로는 이해되지 않는 침술은 인간의 몸을 자연원리에 따라 치료하고자 하는 한의학 특유의 의술이다. 사람의 생명까지도 이러한데 다른 것들이야 말할 여지가 없을 것이다. 사상과 예술은 물론 정치와 민간신앙에 이르기까지 동양인의 삶의 본질은 자연과 따로 떼어 놓고는 이해가 되지 않는다.

  청태(靑苔) 낀 바위를 맴도는 구름과 아침저녁 안개를 대하고, 자유롭고 한가로이 산과 들을 거니는 것을 가장 큰 행복으로 여겼던 옛 선인들의 모습을 단지 자연의 아름다움에 심취한 자연주의자로만 간주해서는 않된다.

  자연을 위대한 스승으로 대하면서 인생의 깊은 철리(哲理)를 거기서 찾아내려 했던 것, 溪聲便是廣長舌 山色豈非淸淨身 이라 읊은 소동파의 시는 이같은 동양인의 정신을 대변해 주고 있는 한 예라 할 것이다.

  이른 봄날, 산도랑 한곁 흰바위에 해맑은 햇살이 내리 비치고 눈녹아 조금씩 흘러내리는 낮은 물소리가 저만큼 멀리인 듯 엷은 바람결에 묻어오는때, 거기  있지 않은 사람에게 그 순간의 경계를 어떻게 말로 전해줄 수 있을까. 우리는 가끔 말이란 것이 얼마나 피상적이고 불완전한 것인가를 실감할 때가 있다. 그냥 와닿는 그 무엇을 말에 의존하려 할 때 그 본질에서 자꾸만 멀어져 감을 느끼면서 안타까워 하는 것이다. 인간의 언어를 빌어서 설명한다는 것이 오히려 참모습을 이해하는데 장애스러울 수 있다는 말이다.

  트인 마음의 눈으로 보면 모두가 제멋 그대로를 지니고 존재의 원리를 드러내 놓고 그저 그렇게 있을 뿐인데 왜들 자꾸만 말과 문자를 빌리려 하는 것인지.

 cement_up.gi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