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서구적 합리주의인가

 

  IMF체제를 겪으면서 우리의 정서와 사고가 갑작스럽게 서구화 되어 가고 있다. 서구적 합리주의에 휩쓸려 우리들 삶이 계량화(計量化)되어 가고 있으며 가시적(可視的)인 성과를 강요당하고 있다. 이에따라 치열한 경쟁이 불가피해졌고 어제까지의 동료가 하루아침에 경쟁적 적대관계로 변해버렸다. 경쟁사회에서 뒤지는 것은 도태를 의미하며 이는 곧 인생의 패배자가 되는 것이다. 오랜 경륜으로 몸에 배고 손에 익은 기존의 가치가 어느 한순간 전혀 새로운 형태의 가치 창출기능에 밀려 초라하게 퇴물화 되어버린다. 마음 푹 놓고 오늘 할 일을 묵묵히 하던 직장인들이 하루아침에 구조조정이라는 합리주의의 불도저에 밀려 어처구니 없이 실직자 신세로 전락하는가 하면 연봉 몇십억원 하는 30대 초반의 현대판 신데랄라가 혜성처럼 나타나기도 한다.

   경쟁이란 무엇인가. 다툼이다. 다툼에는 승자와 패자가 있기 마련이다. 승자의 웃음 뒤에는 패자의 슬픈 눈물과 실의의 아픔이 있다. 경쟁사회, 그것은 바꿔 말하면 동물의 세계, 정글의 법칙에 따라 존멸(存滅)하는 냉정하고도 처절한 싸움터다. 먹고 먹히는 정글의 법칙, 힘있는 자 편에 서는 정의의 신은 승자에게 패자의 고기를 씹을 권리를 준다. 패자는 승자의 먹이가 되어야 한다.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인간사회가 동물세계와 다른 점이 있다면 약자도 강자도 다 같이 정답게 평화를 누리며 산다는데 있다. 함께 행복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인간이 동물보다 우월한 존재일 수 있다.

    숲은 겉으로 평화롭게 보일는지 몰라도 거기엔 언제나 먹고 먹히는 살벌한 싸움이 계속되고 있다. 동물의 세계에서는 헛눈팔이는 죽음과 직결되기 때문에 항시 주변을 두리번 거려야 한다. 얼룩말이 사자에게 먹히는 장면을 보면 동물의 세계에서는 느긋한 평화로움이 허용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사자가 언제 나타날지 모르는 불안한 상황에서 평생을 살아야 하는 것이 얼룩말의 운명이다. 얼룩말 뿐인가. 모든 동물이 잠시도 편안하고 느긋한 시간을 갖지 못하고 안절부절 목숨을 불안하게 이어가고 있다. 연약한 새들은 말할것도 없고 백수의 왕으로 늘 정의의 자리에 있는 사자까지도 잠을 깊이 자지 못하고 반잠 반깸으로 어설프게 잠을 설쳐야 한다.

    여기에 반해 인간세상에서는 누구나 마음놓고 편안히 살 권리가 천부적으로 주어져 있다고 믿고 있으며 이를 지켜주는 것이 법과 규율, 더 높은 차원의 질서와 평화를 추구하는 윤리 도덕이 있다. 법도 윤리와 도덕에 비하면 하위의 개념인데 지금의 사회는 법만 잘 지켜도 훌륭한 사람으로 인정 받을만큼 한심한 사회가 되고 말았다. 그런데 법 보다도 더 하위의 질서개념인 동물적인 경쟁원리가   경제의 탈을 쓰고 새로운 삶의 질서로 우리들 삶을 지배하고 있으며 여기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핵심 사상이 바로 합리주의 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합리주의는 서구의 전유물인가. 동양에는 합리성을 추구하는 사상이 없다는 말인가.  그렇지 않다. 오히려 동양적인 사고에서 더 폭넓은 합리주의를 찾아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적어도 인간이 인간답게 행동하고 진정한 인생이 어떤 것인가 하는 물음에 대한 해답을 얻기 위한 것이라면 동양인의 사고와 삶의 태도가 훨씬 더 합리적이다. 그렇다면 동양적인 합리주의란 어떤것인가.

    서양인들은 자연을 정복하려하지만 동양인들은 자연의 품에 안기고 싶어한다. 동양화 그중에서도 특히 산수화를 보면 사람은 아주 작게 그려놓기 때문에 눈을 비비고 보지 않으면 잘 보이지 않는다. 인간은 자연에 감히 비교할 수 없는 미미한 존재, 그래서 풀잎이나 작은 돌맹이와 같이 붓끝으로 살짝 점을 찍듯 처리해 버린다.  자주 동양화의 주제가 되고 있는 신선도는 동양인의 유토피아적인 생각을 아주 잘 나타내 주고 있다. 수십길 폭포수 아래서 유유자적 산수를 바라보는 선인의 모습을 보면 사람은 자연의 품에서 비로소 만족할 수 있는 하나의 작은 생물에 지나지 않는 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따라서 동양인들은 자연을 정복하려는 욕망을 애당초 품을 수가 없다. 이같이 자연에 대해 외경의 념을 지니고 있는 동양인에게는 자연은 어머니 품처럼 원초적인 그리움의 대상으로 가슴에 깊이 박혀 있다. 따라서 심신이 지치거나 세상에서 버림받았을 때 그곳으로 숨어들어 마음의 평정을 찾고 휴식을 취하려 한다. 자연을 이런 관점으로 바라보는 동양인은 자연에 순응하고 자기의 존재를 겸허하게 인정하며 세상을 살아가는데 있어서도 똑같은 생각을 가지고 자연의 흐름에 운명을 맡기는 것이다. 노장철학은 바로 자연으로 회귀하려는 이같은 동양인의 마음을 잘 대변해 주고 있다.

   사시 절기에 따라 삶의 리듬을 맞추어 가는 동양인으로서는 자연을 정복하고 분석하려는 엉뚱한 생각을 품을 여지가 없다. 달력에 표시된 절기를 따라 밭을 갈고 씨를 뿌린다. 피부에 스치는 바람이 차다고 해서 절기를 못믿어 씨뿌리기를 늦추지 않는다. 동지에 팥죽을 쑤어 먹고 정월 대보름날 보름을 깨무는 풍습도 다 자연에게 순응하고자 하는 동양인의 자연에 대한 삶의 또다른 형태에 불과하다. 인간은 자연의 품에 안겨서 자연의 흐름을 따라 살아갈 때 아무런 탈이 없고 천명을 제대로 누릴 수 있다는 자연주의 신앙을 지닌 동양인에게 있어서 합리(合理)란 곧 자연과의 합일 ,바로 그것이다.

   서양인들이 큰 저택과 넓은 정원을 지니고 도심 한가운데 엄청난 크기의 공원을 만들어 놓았다 해서 그들의 시각이 동양인과 같다고 생각해서는 않된다. 그들에게 그것들은 부의 상징이 아니면 많이 소유하고 있는데 대해 만족하는 것으로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그들도 숲과 풀밭을 즐겁게 거닐지만 자신이 나무나 풀과 동격이라고는 결코 생각하지 않으며 몇백년 된 고목이라도 신성시하지 않는다. 그들은 다만 그것들을 소유물로 간주할 뿐이다. 풀 향기를 맡고 나무 그늘밑에서 바람을 쐬는 모습은 동양인이나 다를바가 없을는지 모르지만 그들의 가슴은 전혀 다른 감정으로 채워져 있다. 이런 견해에 반대하는 서양인이라면 그는 서양인의 얼굴을 한 동양인임에 틀림 없다.

    진정한 동양인이라면 그렇게 돈을 쓰지 않을 것이다. 돈을 쓰지 않고도 얼마든지 그만한 공간을 자기것으로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동양인은 자기 이름으로 등기된 토지와 재산에 만족하기 보다는 얼마나 적게 가지고 있나를 통해서 행복의 가치를 따지는 것이다. 동양인은 아름다운 경치가 내려다 보이는 적당한 곳에 작은 정자 하나를 지어놓으면 된다. 거기에서 그 경치와 맑은 공기와 물을 공짜로 보고 들으며 마음속에 충만한 기쁨을 누린다. 청정(淸淨)한 심성을 자부하면서 적게 소유하는데서 오는 맑은 기쁨(淸貧)을 최고의 명예로 생각하는 것이다. 동양인은 돈과 재물을 최고의 가치로 삼지 않는다. 동양인들이 추구하는 최고의 가치는 가난하고 어려운 가운데서도 지조를 잃지 않고(自尊) 대대로 이어온 가훈을 따라서 명예로운 집안 전통을 지키는 것이다. 얼마전에 신문에서 부정을 저질러 사회의 물의를 일으킨 유명인사를 족보에서 제외시키려고 문중에서 대단한 논쟁을 벌였다는 기사를 읽은 적이 있는데 아마도 서양에서라면 이정도를 가지고 온 문중이 들석거리지 않았을 것이다. 동양에서는, 적어도 우리 한민족으로서는 명예로운 족보에서 이름 석자가 지워진다는 것은 이보다 더한 불명예가 없다고 생각한다. 이는 곧 영원히 그 집안에서 그 피를 이어받았다고 말하지 못하는 치욕을 당하게 되는 것이며 그것은 생매장이나 다름 없기 때문이다.

   서구적 합리주의가 계량적이고 가시적이라면 동양의 그것은 수치로 나타낼 수 없는 무(無)와 공(空)적1)인 데서 더 큰 가치를 찾는다는데 의미를 두고 있다. 동양의 합리주의는 따라서 넉넉함과 여유로움, 느긋함과 평화로움을 그 속에 깊고도 넓게 내포하고 있다. 경제적으로 이해득실을 따지지 않는 허술하고 느슨한 동양인이 서양인의 눈에 불합리하고 비능률적으로 보일는지 모르나 이같은 서양인들의 부정적인 시각은 잘못된 것으로 이같은 그들의 지적에 전전긍긍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우리에게는 동양인의 피가 흐르고 있으며 그 피속에는 쉽게 지워지지 않는   동양적인 합리주의가 몸속에 배어있음을 알아야 할 것이다. 봄날 몸에 꼭 맞지 않는 헐렁한 옷을 입고(꼭 맞는 옷은 서구적 합리) 버들 푸른 냇가를 거닐고 맑은 물에 목욕하고 풀을 딛고 어슬렁거리다가(시계바늘에 얽매여 기계처럼 움직이는 삶은 서구적 합리) 해질녁에 집으로 돌아오기를 즐기는 동양인의 삶을 합리적이지 않다고 말할 근거가 있을까.

   만물의 영장이라고 자처하는 우리가 무엇 때문에 마음을 졸이며 작은 새 모양으로 불안하게 살아야 된단 말인가. 넓은 풀밭에서 마음놓고 뒹굴며 아름다운 석양을 바라보면서 느긋하게 산책하는 즐거움을 버리고 열중해야 할만큼 중요하고 값진 것이 도대체 무엇인지 모르겠다. 왜 우리는 숨을 헐떡이며 뛰기만 해야 한단 말인가. 해가 지기 전에 더 많은 땅을 차지하기 위해서 죽기 기를 쓰고 뛰고 또 뛰다가 결국 쓰러져 단 반평에 불과한 땅에 묻히는 똘스토이의 우화를 반복하는 어리석음을 범하려는 것은 아닌가.

    

 

1 無와 空은 동양사상 특히 노장과 선불가의 핵심이라 할 만큼 그 의미는 깊고도 폭넓게 사용되고 있는데 이들을 각각 사용하기도 하고 無空으로 붙여 쓰기도 한다. 무공은 결국 무와 공의 의미를 강조하고 그 뜻을 명확히 하기 위한 불가피한 것으로 없음(無)이 현상적인 없음이 아니며 텅 비어 있음(空) 역시 감각적인 공이 아님을 이해시키기 위한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필자는 무와 공의 용어를 현상적인 有보다 더 實한 가치와 의미를 부여하고 있는 동양의 사상적 인식을 전제로 썼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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