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스럽다는 것

 

  採菊東籬下 悠然見南山, 동쪽 울타리 밑에서 국화 꺾어들고 유연히 남산을 바라본다.

  동양의 시를 좋아하는 사람치고 도연명(陶淵明)을 좋아하지 않는 이는 없을 것이며 도연명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당연히 이 시구를 모르는 이는 없을 것이다.

  속됨을 싫어하면서도 속세를 떠나지 않고 자연을 깊이 사랑하면서도 인간세계에 동정어린 애정을 쏟으며 한가와 탈속의 삶을 살다간 달관의 생활인 도연명, 아침 이슬진 잔디를 밟으면서 뽕나무 위에서 울어대는 닭 울움소리를 듣고 속썩이는 자식들이 안타까워 가슴 태우는 아버지로서의 고민을 안고서도 정신적인 면에서는 세속을 떠나 무사한도인(無事閑道人)의 삶을 살았던 도연명, 그는 분명 동양인이 꿈꾸는 이상적인 삶을 현실화한 진정한 동양의 도인 이었다. 앞 뒤 구절을 떼어버린 이 짤막한 시구만으로도 맑고 자유스러운 시인의 심경을 읽어낼 수 있다.

  가을은 짧게 지나가 버린다.

  하늘이 높아지면서 맑고 청량한 기운이 감도는 듯하면서 어느샌가 찬서리가 내리고 텅빈 들녁으로는 허허로운 바람이 겨드랑 밑을 스쳐지난다. 한여름 무한정 푸르름을 간직할 것 같던 나무들도 황갈색 잎으로 바뀌어 가면서 곧이어 다가올 겨울을 앞두고 잎을 떨굴 채비를 서두르고 있다. 흙으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색깔부터 흙에 맞춰야 하는 것인가.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국화 그중에서도 노란 국화는 가을에 걸맞는 꽂이란 생각이 든다.

  가을은 모든게 맑아 보인다. 하늘이 그렇고 대기가 그렇다. 가을에 들면 우리의 정신도 새벽 별빛처럼 초롱초롱 맑아진다. 밤 늦도록 책을 가까이 하려는 것도 가을 밤의 정기가 어느때 보다도 맑기 때문이다. 달빛이야 어느때라고 그 투명하기가 덜하지 않겠으나 냉냉한 가을 밤기운에 그 빛은 처절하도록 맑고도 밝다.

  모두가 맑은 가을, 오후의 햇살은 맑은 물에 헹궈낸 듯 깨끗하고 산뜻하다. 서두를 일도 없고 종일을 가도 찾아오는 이 없는 한가로운 시골 생활, 아무런 생각 없이 집밖을 서성이다 보니 동쪽 울타리 한곁에 노란 국화송이가 한낮의 햇살을 받아 더없이 화사하다. 아름다운걸 보면 자기도 모르게 손이 가는게 인지상정, 무심코 한송이 꺽어들고 미적인 행복에 겨워 있는데 저 남쪽 산머리가 눈에 들어온다. 언제나 거기 그렇게 있던 산이었음에도 그 순간 눈에 들어온 산빛은 여느때의 산이 아니다.

  더 아름답다는 의미가 아니다. 뭔가 깊은 뜻을 지니고 서있는 그런 산이라는 의미도 아니다.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완전함, 이 우주의 신비와 진리를 그대로 드러내 보여주듯 가리워지지 않은 본래의 그 어떤 참 모습일까. 그것은 의식이 가미되지 않아 지극히 맑고 투명하고 자유로운 심경에서 활짝 열려 있는 눈에 자연스럽게 비쳐드는, 있는 그대로의 참 경계라 할까.

  한학에 미흡한 나로서는 정확히 그뜻을 파악할수 없지만 여기에 쓰여진 견(見)자는 바라본다는 의미 이기보다는 저절로 눈에 비쳐진다는 피동의 뜻으로 해석함이 시인의 의도에 가까울 듯 싶다. 아침 창문을 열어젖힐 때 쏟아져 들어오는 햇살처럼.

  최대의 기쁨이란 어떤 것일까. 욕망을 채울 때 일까. 아니면 모든 것에서 자유로와짐으로써 얻어질 수 있는 것일까. 무한한 욕망을 채우려는 생각으로는 이같은 기쁨에 도달하기는 불가능한 일, 그렇다면 욕망을 털어버리고 자유로와지는 길만이 지고의 행복에 이르는 방법일 것이다. 그러나 욕망은 그리 쉽게 내게서 떠나주지 않는다. 아무리 온갖 명예와 부귀를 훌훌 털어버렸다는 사람도 맑은 솔바람과 푸른 산빛을 탐하려는 마음까지 벗어던지기는 그리 쉽지 않다. 이같은 삶이 시비선악을 가리는 인간의 눈에는 나무랄수 없이 아름다운 삶으로 비쳐질는지 모르나 이 역시 욕망이기는 마찬가지다. 솔바람 맑은 소리를 탐하려는 귀와 재물을 긁어 모으려는 욕심과는 차원을 달리할 뿐, 그 근원을 파고들면 모두 한 뿌리에서 갈려나온 것, 탐한다는 면에서는 다를게 없는 것이다.

  깊은 산, 외진 곳에서 숨은 듯 피어 있는 가냘픈 야생꽂 한송이가 탐스럽게 무더기로 피어 있는 정원의 꽂들보다도 웬지 모르게 가슴 깊이에 선한 감정을 고이게 하는 까닭은 무얼까. 자연스러움 때문이다. 제 본연 그대로를 아무런 욕심도 없이 자연에 맡겨 버림으로써 그 어떤 작위(作爲)의 티를 지니고 있지 않는 까닭이다. 자연 그대로를 지키면서 살아가는 삶만큼 더 아름답고 참된 기쁨을 가져다 주는 것은 없는 것이다.

  예술작품을 감상하는데 있어서 분석은 금물, 아름다운 구석과 빛깔을, 그리고 어떤 형상을 염두에 두고 이같은 틀에 애써 끼워 맞추려 해서는 안된다. 꽂향기를 요리조리 따져가며 분석해 맡을 수 없듯이, 진정한 의미에서의 미적 감각이란 직관을 통해서만 제대로 얻어질 수 있는 것이다. 텅 비워놓은 영혼의 공간만이 밖으로부터 신선한 공기를 받아들일 수 있다.

  이 세상에 태어날때의 모습 그대로의 눈과 귀로 돌아갈 때, 보이는 것 들리는 것 모두가 추(醜)와 상대되는 개념으로서가 아닌 본래의 모습을 보여주게 될 것이며 삶은 한층 자유로워질 수 있을 것이다.

  아프리카 <부시맨>의 죽음에 대한 생각은 복잡한 이론과 사상에 길들여진 문명인들에게는 가히 충격적이다. "살다가 죽으면 그냥 죽는 것이다." 그 어떤 철학과 종교도 이 아프리카 자연인의 삶의 의미를 만족스럽게 설명할수 있을 것 같지 않다.

  물들어 떨어진 잎들이 늦가을 바람에 구른다. 쓸쓸해 보이기는 하나 보기 싫지는 않다. 자연의 이치, 우주의 질서를 따르는 자연스런 모습인 까닭이다.

  자연스럽다는 말은 존재하는 것들에게는 최대의 찬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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